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포비아 페미니즘 (문단 편집) == 여성계의 반응 == 예상했을 수도 있겠지만 학계에서 소통되는 서평은 없다(…). 대신 거론할 만한 것들이 몇 가지 발견되는데, 우선 《노동자연대》[* 참고로 이 언론은 강남역 살인사건 당시부터 대다수 페미니스트들의 여론을 거슬러서 마르크스주의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노동계급 여성은 노동계급 남성들과 적대하지 않으며, 도리어 이해관계가 상통하고, 여성들은 계급투쟁의 주체이지 무기력한 피해자가 아니다" 라는 것.] 에서 최미진(2017)의 서평을 투고한 적이 있다. [[https://wspaper.org/article/19841|#관련기사]] 이 기사에 따르면, 본서는 여성계 일각의 문제점을 잘 통찰했으며, 그 원인을 '정체성 정치가 계급 문제를 흐리게 하고 파편화시킨다' 는 점을 잘 포착했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몇몇 한계점들을 지적할 수 있다. '''첫째,''' 저자의 '계급' 이라는 용어는 불분명하며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와도 차이가 있어 보이고, 이를 바탕으로 한 진보진영에 대한 진단 역시 동의하기는 어렵다. '''둘째,''' [[메갈리아]]와 [[워마드]]는 항상 동일한 반사회적 혐오사이트로 취급되어서는 안 되며, 미러링을 한다는 점만 같을 뿐 그 사회적 배경은 서로 엄연히 다르다. '''셋째,''' 《[[소모되는 남자]]》 에서부터 기원하는, 여성들이 노동시장에서 더 낮은 지위를 '선택' 하고 '선호' 한다는 생각은, 사회적으로 명백히 존재하는 구조적 모순을 희석시키는 주장일 뿐이다. '''넷째,''' 성 소수자 문제에 대해서 "[[문재인|반대한다]]" 거나 "[[나중에|나중에 논의하자]]" 는 정치인들의 차별옹호적 코멘트를 긍정하거나 불가피한 것이라고 평가하는 것 역시 공정하지 않다. 그 밖에, 본서에 대한 반응은 아니지만, 이미 [[1994년]]에 유사한 논지의 문헌이 존재한다. 류숙렬(1994)[* 류숙렬 (1994). '빅팀 페미니즘'에서 '파워 페미니즘'으로. 중등우리교육, 53, 124-125.]은 두 페이지의 짧은 칼럼에서, 박가분 씨가 비판하는 페미니즘의 경향을 이미 '빅팀 페미니즘' 으로 정리하고, 여성의 가능성과 자신감을 강조하는 페미니즘을 '파워 페미니즘' 으로 설정하여, '''전자에서 후자로 옮겨갈 것을 촉구하였다.''' 이는 본서에서도 자주 인용한 바 있는 나오미 울프(N.Wolf)가 《Fire with Fire》 라는 신간에서 '무력한 희생자 여성' 구도를 세우는 페미니즘을 비판한 것에 대한 호응이라고 할 수 있다. 양자를 서로 비교하자면, 빅팀 페미니즘은 도덕적으로 경직되어 있다면, 파워 페미니즘은 여성들의 자연스러운 추구를 긍정한다. 또한, 빅팀 페미니즘은 비판과 고발이 눈물과 비극의 비장미로 서사화되지만, 파워 페미니즘은 비판과 고발을 웃음과 장난의 해학으로 서사화한다는 차이가 있다. 저자는 파워 페미니즘이 여성들이 기존 제도의 비극적인 희생자가 아니라 기존 제도를 가지고 얼마든지 장난을 칠 수 있는 힘이 있다고 프레임화함으로써, 더 많은 여성들을 참여하게 할 수 있으리라고 전망한다. 페미니즘 문헌들에서 간접적으로 본서를 언급하는 경우는 종종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손희정(2017)의 《[[페미니즘 리부트]]》 이다. 여기서는 미디어-정동 이론을 활용하여, 본서가 [[팩트체크]]를 한다고 하였지만, 정작 그 '팩트' 가 '''소비되고 유통되는 과정에서 [[혐오]] [[정동]]이 집단감응을 일으키며 확산된다'''고 비판하였다. 이와 함께, 손희정(2017)은 《일베의 사상》 에서 저자가 일베 이용자들이 탈맥락화를 하는 경향을 잘 그려냈지만, 이번에는 저자 자신이 젠더문제에서 탈맥락화를 시도한다고도 비판했다. 마지막으로, 손희정(2017)은 대중 사이에서 저자가 상당한 평론적 권위를 누리고 있다는 점에 비추어 보면, 저자는 차라리 (대중에게 흔히 [[백과사전]]처럼 여겨지곤 하는) [[나무위키]]에 가깝다고 정리했다. "팩트의 소비" 라는 측면에서 본서를 공격하는 문헌은 또 있다. [[강준만]](2018)의 《[[오빠가 허락한 페미니즘(도서)|오빠가 허락한 페미니즘]]》 은 본서에 대해 직접 비판하지는 않지만, 참고문헌에서 본서의 존재를 언급하는 것으로 보면 본서의 논리에 그다지 설득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는 6장의 《[[혐오의 미러링]]》 비판에서, 박가분 본인뿐만 아니라 "[[사이다(유행어)|사이다]]" 나 "[[팩트폭력]]" 을 말하는 그의 지지자들이 '''사실 물신주의'''(fetishism of facts)'''에 빠져 있다'''고 비판했다. 실상, 사실(fact)이라는 것도 담론의 결과물로서 얼마든지 프로파간다 용도로 사용될 수 있으며, 특히 사회문제를 개인화하고 탈구조화한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강준만(2018)은, 직접 인용하지는 않았지만, 앞서 소개한 손희정(2017)과도 의견을 같이 한다. 강준만 교수는 진보와 보수 사이에서 [[기울어진 운동장/정치|기울어진 운동장을 이야기할 정도의 불균형]]은 없지만, 남녀 간에는 [[기울어진 운동장/페미니즘|실제로 기울어진 운동장이 명백히 존재한다]]고 보는 입장이라고 스스로를 밝히고 있다. 남성 페미니스트 작가인 [[최태섭]](2018)의 저서 《[[한국, 남자]]》 역시 살펴볼 수 있다. 이 책은 본서를 언급하지는 않았으나, 본서의 3장과 거의 유사한 통계 데이터들을 5장에서 들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본서와 유사한 통계를 가지고 '''정반대의 해석을 시도'''한다는 점이다. 최태섭(2018)은 한국 남성들이 정보를 취사선택하고 혐오를 조작한다고 공격하고 있다. 두 서적의 공통점은, "페미니스트들은/한국 남성들은 자기 보고 싶은 것만 본다" 면서 상대방 진영의 '''선택편향의 행태를 비판'''한다는 것이다. 반면, 두 서적의 차이점은, 본서는 그 선택편향의 원인을 PC운동과 정체성 정치에서 찾는다면, 최태섭(2018)은 탈진실(post-truth) 시대에서 찾는다는 것이다. 즉, 탈진실 시대에는 사람들이 자기 믿고 싶은 것만 골라서 그것만이 진실인 양 믿는 경향이 있는데, 남성들이 통계를 해석하는 것도 (그리고 그 해석을 제시하는 본서도) 그렇다는 것이다. 즉 최태섭은 남성들이 태도를 확증편향이라고 본 것이다. 그러나 최태섭(2018)은 자신의 주장이 탈진실적일 가능성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